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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조선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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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순왕후는 조선 영조의 계비로, 1759년 영조와 혼인했다. 영조보다 51세 연하로, 조선 왕실에서 가장 큰 나이 차이의 부부였다. 영조 사후 왕대비가 되었으며, 순조 즉위 후에는 대왕대비로서 3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고, 노론 벽파를 등용하는 등 정조의 개혁 정책과 상반되는 정치 행보를 보였다. 1803년 수렴청정을 중단하고 1805년에 사망했으며, 영조의 능인 원릉에 합장되었다. 그녀 사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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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조선 영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물 사진 없음
초상화 없음
휘호정현소숙정헌(正顯昭肅靖憲)
존호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
별칭예순대왕대비(睿順大王大妃)
예순왕대비(睿順王大妃)
신상 정보
출생1745년 12월 2일
출생지조선 경기도 여주 여주읍 사제
사망1805년 2월 11일 (59세)
사망지조선 한성부 창덕궁 경복전
능묘원릉(元陵)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동구릉)
가문경주 김씨
아버지오흥부원군 김한구
어머니원풍부부인 원주 원씨
혼인 정보
배우자영조
자녀없음
왕비 정보
왕비 책봉1759년 6월 20일
왕비 폐위1776년 3월 5일
전임 왕비정성왕후 서씨
후임 왕비효의왕후 김씨
왕대비 정보
왕대비 책봉1776년 3월 10일
왕대비 폐위1800년 7월 4일
전임 왕대비경순왕대비 어씨
후임 왕대비왕대비 김씨 (효의왕후)
대왕대비 정보
대왕대비 책봉1800년 7월 4일
대왕대비 폐위1805년 1월 12일
전임 대왕대비혜순대왕대비 김씨 (인원왕후)
후임 대왕대비명경대왕대비 김씨 (순원왕후)
수렴청정 정보
수렴청정 시작1800년 7월 4일
수렴청정 종료1803년 12월 28일
전임 수렴청정인순왕후 심씨
후임 수렴청정순원왕후 김씨
기타
전호효안전(孝安殿)

2. 생애

1759년 영조정성왕후가 승하한 후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 중에서 새 왕비를 책봉하지 않고 간택령을 내려 김한구의 딸을 새 왕비로 맞이하였다. 당시 영조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로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큰 나이 차이를 보이는 혼인이었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보다 나이가 어렸으나, 일족과 함께 사도세자의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정조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간택 당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이냐고 묻자, 정순왕후는 인심(人心)이 가장 깊다고 대답하여 영조를 감탄하게 하였다.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자녀는 없었다.

1776년 남편 영조가 승하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나, 오빠 김귀주가 혜경궁 홍씨의 문병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조에 의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김귀주는 1786년 유배지에서 병사하여 정순왕후와 정조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800년 순조 즉위 직후부터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행하여 3년간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 기간 동안 천주교 신자를 포함한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를 일으켜, 정약용, 이가환 등을 숙청하였다. 1803년 12월 수렴청정을 중단하고, 1805년 창덕궁 경복전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61세. 영조의 능인 원릉에 안장되었다.

정순왕후 사후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745년 현재의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주 원씨의 딸로 태어났다. 본가는 경기도 여주시에 있었다. 김한구의 고조부는 효종 때 강빈의 신원을 청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이다.

1745년 12월 2일, 김한구와 원주 원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조 재위 시절 충청남도 서산시의 부유한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고향은 경기도 여주시였다.

5대조를 통해 신라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차남 김은열의 25대손이었다. 김정구를 공통 조상으로 하여 조선 제2대 왕 정종의 왕비인 정안왕후와도 먼 친척 관계였다. 김정구는 김은열의 손자였다.

5대조 외증조모를 통해 태조와 원경왕후의 장남이자 세종의 형인 이제의 8대손이었다.

가계
아버지김한구 (1723년 ~ 1769년)
어머니원풍부부인 원주 원씨 (1722년 ~ 1769년)
형제
김귀주 (1740년 ~ 1786년)
김인주 (1743년 ~ ?)


2. 2. 영조 시대: 왕비 책봉과 궁중 생활

1757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 중에서 새 왕비를 책봉하지 않았다. 1759년 6월 9일 정식 중전 간택을 통해 김한구의 딸을 새 왕비로 맞이하였고, 6월 22일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렸다.[3] 당시 영조의 나이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로 조선 개국 이후 가장 나이 차가 큰 혼인이었다.[3]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렸다.

간택 당시 영조는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다른 규수들은 ‘산’, ‘물’ 등을 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라고 답하여 영조의 눈길을 끌었다.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로 영조를 감탄시켰다고 한다.[3]

왕비 책봉 이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여 어린 나이에도 왕비의 체통을 중시하였다.[3] 남편 영조의 총애는 깊었지만, 대군이나 공주를 소생하지 못하였으며 임신이나 유산했다는 기록도 없다.

2. 3. 정조 시대: 갈등과 견제

영조 후기 영조의 양대 척신 가문인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비 김귀주경주 김씨 측과 혜경궁 홍씨 친정 풍산 홍씨 측은 영조 말년에 계속적으로 대립했다. 남편 영조가 승하하고 손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로 승격되었다.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는 영조 시기에 후일 정조가 중용하는 청명당과 함께 행동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을 제수받고 홍인한, 정후겸 탄핵에 동참했다. 그런데 정조는 홍인한, 정후겸에 대한 처분이 마무리되자마자 김귀주가 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흑산도로 귀양보냈다. 김귀주는 1786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1]

2. 4. 순조 시대: 수렴청정과 신유박해

1800년 8월 18일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대왕대비로 승격되어 왕실의 제일 큰 윗전으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조가 죽은 다음날부터 언문교지를 내려 정사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친인척과 노론 벽파 인사들로 조정을 채워넣었다. 이는 국상 중에는 모든 정사, 특히 인사 조치를 중지하는 관례를 깨는 조치였다.[4]

국상이 끝나자 정순왕후는 천주교 금지령을 내려 이를 통해 자신과 대립되는 남인, 소론 시파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을 처형시켰고,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을 폐지하였으며, 정조가 묵인하던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여 남인과 소론 시파들을 축출하였다. 또한 정조가 내쳤던 김관주 등의 노론 벽파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1802년, 정조의 유지에 따라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책봉하고 김조순을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하고 관직을 제수하였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 사학(邪學, 천주교)의 엄금을 하교하여 천주교를 박해하는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다.[5]

이러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정책은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노론 벽파의 정적이자 천주교인들이 상대적으로 많던 남인과 시파(時派)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숙청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로 인해 남인 출신인 정약종과 이승훈이 처형되었으며, 이미 배교한 이가환도 장살당하였으며 정약용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신유박해 이후 이에 불만을 품은 정약현(정약용의 맏형)의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에 의해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탄압은 더욱 거세어진다.

2. 5. 말년과 죽음

1803년(순조 3) 평양부와 함흥부에 큰 불이 나고, 11월에는 사직악기고, 12월에는 창덕궁 선정전, 인정전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6] 닷새 후 장안의 종루 거리에서 다시 큰 불이 나 인심이 흉흉해지자, 정순왕후는 1804년 2월 9일(1803년 음력 12월 28일) 수렴청정에서 물러났다.[7]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그의 장인이자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 관료가 숙청되고 정순왕후의 영향력도 약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조선의 정치가 당파 중심에서 외척 중심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결국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정순왕후는 허망한 말년을 보내다가 1년 뒤인 1805년 2월 11일(음력 1월 12일), 창덕궁 경복전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으로 영조와 함께 묻혀있다.

3. 논란과 의혹

정순왕후는 여러 논란과 의혹의 중심에 있었다.

정순왕후가 '여군(女君)' 혹은 '여주(女主)'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을 두고, 스스로를 여자 국왕이나 여자 임금으로 칭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은 조선 시대에 왕후 등이 흔히 사용하던 용어였으며[8], 정순왕후 외에도 다른 대비들이 사용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9] 정순왕후는 정조 재위 기간에도 '여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기록이 있어(정조 10년 12월 1일), 이를 '여자 임금'으로 해석하는 것은 맞지 않다.[10]

영조 후기,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비 김귀주경주 김씨 가문과 혜경궁 홍씨의 친정 풍산 홍씨 가문은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는 왕대비가 되었다. 김귀주는 영조 시기에 정조가 중용하는 이들과 함께 행동했고, 정조 즉위 후 홍인한, 정후겸 탄핵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들에 대한 처분이 끝나자마자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 보냈고, 김귀주는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정조는 김귀주가 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영조 때 김귀주가 외조부 홍봉한을 탄핵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이듬해 정순왕후는 홍인한, 정후겸 처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담은 책 《명의록》을 편찬하여 정조 즉위에 자신이 기여했음을 알렸다. 이 내용은 《정종대왕행장》과 정순왕후 자신의 《행장》에서도 확인된다.[11]

慈殿佑我|자전우아|나의 자전(慈殿)이 과인의 몸을 보우(保佑)하였음은 인원성후(仁元聖后, 인원왕후)가 선대왕(영조)을 보우함과 같았습니다.중국어

- 정조어제 오흥부원군 김한구(정순왕후 부) 치제문 중

정순왕후와 정조의 관계는 극심한 대립 관계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12] 《일득록》에는 정순왕후에 대한 정조의 친밀한 감정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록을 쓰면서 정조가 자신을 극진히 모셨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3. 1. 호칭 논란: 여군(女君)과 여주(女主)

순조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에 정순왕후가 여군(女君), 여주(女主)를 자칭하는 것을 두고 본인이 여자 국왕, 여자 임금임을 자처한 것이라는 해석이 한동안 주류를 이뤘으나 이는 완전한 오류이다. 여군, 여주는 모두 동양권에서 왕후 등이 사용하였던 용어이며[8], 정순왕후 외 조선의 다른 대비들이 사용한 기록이 다수 존재한다.[9] 정순왕후는 정조 생전에도 여군(女君)을 자칭한 기록(정조 10년 12월 1일)이 있으니 이것이 '여자 임금'이라는 의미일 수는 없는 것인데, 전술한 통설은 이러한 점을 완전히 간과한 오류를 범하였다.[10]

3. 2. 정조와의 관계: 갈등과 협력의 양면성

영조 후기 영조의 양대 척신 가문인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비 김귀주경주 김씨(慶州金氏) 측과 혜경궁 홍씨 친정 풍산 홍씨(豊山 洪氏) 측은 영조 말년에 계속적으로 대립했다. 남편 영조가 승하하고 손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王大妃)로 승격되었다.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는 영조 시기에 후일 정조가 중용하는 청명당과 함께 행동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을 제수받고 홍인한, 정후겸 탄핵에 동참했다. 그런데 정조는 홍인한, 정후겸에 대한 처분이 마무리되자마자 김귀주가 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흑산도로 귀양보냈다. 김귀주는 1786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정조는 김귀주가 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흑산도로 귀양보냈다. 이 날 연석에서 정조는 김귀주를 귀양보낸 실제 이유는 영조 때 김귀주가 외조부 홍봉한을 탄핵한 데 있음을 밝혔다. 이로 인해 정조와 정순왕후 사이에 어떤 긴장 관계가 생겼는지 여부는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듬해 홍인한, 정후겸 처분에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홍보하기 위한 책 《명의록》을 편찬하였을 때, 이 책 속에서 '세손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전이 안에서 세손을 도와 세손이 무사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을 수록하여, 그가 정조 즉위에 공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밝혔다. 이 부분은 정조 사후 간행된 《정종대왕행장》과 정순왕후 사후에 간행된 그 자신의 《행장》 등에서 재확인되는 내용이다.[11]

慈殿佑我|자전우아|나의 자전(慈殿)이 과인의 몸을 보우(保佑)하였음은 인원성후(仁元聖后, 인원왕후)가 선대왕(영조)을 보우함과 같았습니다.
정조어제 오흥부원군 김한구(정순왕후 부) 치제문 중중국어

세간에는 정순왕후와 정조가 극심한 대립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으나,[12] 《일득록》에는 정순왕후를 향해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기록이 전하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록을 쓰며 정조가 자신을 극진히 공양했음을 과시하고 있다.

4. 평가

정순왕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참조

[1] 논문 How and when the Gyeongguk daejeon System Dismantled? https://rks.accesson[...] 2009-09-01
[2] 논문 The Joseon Government's Changing Perception of Early Catholicism Examined through Law Application https://muse.jhu.edu[...] 2020-01-01
[3] 뉴스 65세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https://news.naver.c[...]
[4] 서적 한국사 이야기 16 한길사 2009-04-10
[5]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1838-01-10
[6] 서적 왕비열전 선영사 2003-01-01
[7]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1838-12-28
[8] 문서 여군(女君)항목 국립국어연구원
[9] 문서 조선왕조실록
[10] 문서 여군(女君)항목 국립국어연구원
[11] 문서 김귀주와 관련한 《명의록》의 기록
[12] 문서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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